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압둘 라작 (문단 편집) == 업적 == 오늘날 초대 수상인 툰쿠 압둘 라만과 더불어 말레이시아의 국부로서 추앙받는다. 라작 총리는 [[5.13 사건]]으로 국내가 혼란스러워지자, Rukun Negara를 도입했다. 이 Rukun Negara는 쉽게 말하면 [[국민의례]] 같은 것이다. 애초에 5.13 사건의 원인은 민족 간의 갈등이었기 때문에, 이를 진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여기서는 "신을 향한 믿음", "헌법 수호" 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말레이인]]의 사회적 지위가 약하다고 판단해 일명 [[부미푸트라 정책]]을 도입했는데, 이는 중국계를 견제하며 말레이계 인들을 사회적으로 더 우대하는 정책이다. 이 정책은 말레이계를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통과 된 법이다. 이 법은 국립 대학의 70 ~ 80%는 말레이계를 뽑아야 한다거나, 주택 분양이나 차량구매에서 할인을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정책으로 말레이계의 경제적 여건은 확연하게 성장했지만, 2018년에는 UN 인종차별철폐협약(ICERD)를 정부가 비준하며 폐지의 수순을 밟고 있다. 이러한 정책들은 [[민주행동당]](DAP), [[인민정의당]](PKR) 등 야권으로부터 "독재적", "인종차별적"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고, 특히 말레이시아 야권 중 역사가 가장 오래 된 DAP는 라작을 독재자,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 Rukun Negara 도입 과정에서의 계엄령 선포라던가, 부미푸트라 정책 도입 등에 대한 비판은 야권으로부터 여전하다. 그러나 라작은 사후 말레이시아의 국부로서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게 되었고, 그의 아들 중 하나인 [[나집 라작]]은 이러한 라작의 후광을 받아 라작의 지역구를 계승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라작 사후 33년이 지난 2009년 총리에 오르면서 대표적인 부자(父子) 지도자가 되었다. 외교정책에 있어서 현대 말레이시아의 비동맹, 중립화 외교정책의 기조를 다진 인물이다. 1970년 비동맹회의와 유엔 총회 및 1971년의 영연방회의에서 동남아의 중립화를 제안하거나, 1974년 동남아시아 국가로서 처음으로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의 모습을 보여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